부정의를 질타하지 않은 법어와 봉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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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16 10:34:53 |
윤남진_소셜리서치 앤 멘토르 대표 | stupa2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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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스의 정의론을 약간만 인용하자면, 그는 윤리학에 있어서 두 개의 중요 개념은 ‘옳음(정당성 : the right)과 좋음(선 : the good)’이라고 했다. (그래서) ‘윤리설의 기본 개념은 이 두 가지 기본개념을 규정하고 관련지우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며,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진다.
옮음과는 독립적으로 좋음을 규정하거나 혹은 옳음을 좋음의 극대화로 해석할 수 있는가? 2.
지난달 24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의류 공장이 무너지는 참사로 1000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동절 오전 미사에 앞선 즉흥연설에서 이에 대해 노예노동이 부른 참사라며 제3세계 근로자들에 대한 기업들의 부당한 처우를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진 베드로 광장의 공개미사에서도 노동은 인류 존엄의 근간이라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거듭 설파했다고 한다.
한국의 기업이나 비영리시민사회단체들이 대체로 구호활동이나 사회개발지원 같은 사회공헌의 관점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이 있는 가운데, 교황의 언급은 인권과 노동권이라고 하는 정의의 관점에서 정면으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인권, 노동권, 환경, 반부패라고 하는 유엔 차원의 협약에서 제시한 기업 사회책임의 4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보편적 가치기준에 적확한 발언이었다.
한국 천주교의 사목지침에서도 그렇듯이 사회참여를 통한 정의의 구현은 교회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사명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불교교단에서도 사회참여활동의 필요성은 여러모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처럼 조직체의 본원적 활동의 중요가치의 하나로 정의되어 제시되고, 조직체의 활동(상황에 대한 이해와 판단, 그에 따른 메시지 송출 등)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됨으로써 통일성과 일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일례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 14항’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 교회의 일상생활과 체험, 교회의 사명과 노고를 기울여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간에 대한 위협들,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 현세 생활의 모든 요소가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에 맞갖게(딱 알맞게) 만들려는 노력에 ‘상반되어 보이는 모든 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천주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든 않든 간에 언명만으로도) 인간의 존엄성의 실현에 위배되는 ‘모든 인간의 상황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선험적으로 혹은 관행적으로 제시되어지고 있는 선한 행동, 이타적 행위, 기부 행위 등과 같은 미담류의 것들에 사고를 한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 전체의 체계에 대한, 사회구조적 제약에 대한 비판적인 상황감지능력과 생각하는 힘을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큰 불선(不善)과 위선을 용인하거나 나아가 그에 빌붙고 결탁하기까지 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런 차원에서, 또한 우리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삶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러한 삶을 자각한 이들이 중단 없이 그런 삶을 개척하고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된 체계(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이의 교정을 위해 정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보는 것도 탄생게에 대한 재음미로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부정의한 상황을 교정하기 위한, 정의를 위한 노력이 배제된 자비행이란 어떤 측면에서는 한 인간을 더더욱 불쌍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럴 때 종교는 아편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견지, 그런 지평 하에서 봉축을 맞아 교계에서 쏟아내고 있는 다양한 메시지나 실천들은 ‘옳은 것’에 대한 입론이 지나치게 부족하고, ‘좋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넘칠 정도로 많게 느껴진다.
‘모든 분들이 일심一心으로 하나 되어 새롭게 출범한 정부의 역량을 굳게 믿고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면 경제와 국방이 더욱 견실해져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이며’라고 어느 봉축법어에서 언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견실한) ‘경제와 국방’은 사회공동체의 공고한 유대에서 나오며, 사회공동체의 공고한 유대의 바탕에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전제가 있으며,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사회공동체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기회, 민주주의적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자유와 기본권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숙고가 반영된 것임이 충분히 담아졌다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조계종총무원의 봉축사에서도 ‘탐욕과 증오, 편견과 차별을 내려놓고, 멈추어 서서 다시 바라보며’, ‘연대와 협력의 손을 잡고 평화와 행복의 길에 동행’ 하자고 참 좋은 말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그리고 이어서 간절한 문투로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열거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어떤 결심이나 진정성이 읽혀지지 않는 것은 왜 일까?
부정의한 행위에 대한 통렬한 질타의 사자후가 없고, ‘옳은’(정의) 행위와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언급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호소로 그치며, 보편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볼 때 사회공동체 구성원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에 대한 확인과 그를 증명하고 수호해야하는 실천집단(목탁)으로서의 절실한 사명감이 함께 표현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나 말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등에’라는 곤충이 있다.
부처님 오신날. 우리의 ‘중생의 상황’에 대해 시시각각 활발발 깨어있지 못한 지적 태만을,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결심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사홍서원)의 유약함을 타매하고, 마침내 독배를 마다하지 않을 ‘한국불교의 등에’는 어디에 있을까. 눈뜬 소경의 헛소리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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